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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모든 것이 빌드업이었다 말할 수 있다면

 

 시각예술은 고대 신전의 물리적인 공간부터 오늘날 버추얼 뮤지엄의 가상공간까지의 긴 역사 속에서도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관객에게 선보여왔다. 흡사 무대 뒤 공연을 준비하는 배우들처럼 시각예술작가들은 전시를 개최하기 전까지 전시장 밖, 자신의 작업 공간에서 작품을 제작한다. 그 제작 과정은 주로 작업하는 주체의 개인적인 활동이며, 모두에게 공개되는 경우는 그 공개 과정 자체가 작품의 개념에 연결성이 있거나 전시 주최 측의 요청처럼 작가의 판단과 필요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설혹 공개된다 하더라도 이는 아직 ‘완성’되기 전 단계이기 때문에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작가가 만든 ‘것’은 습작과 같이 온전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시각예술 작품은 첫 ‘전시’를 통해 ‘완성’된 작품을 공식적으로 선보인다. 여기서 ‘전시’를 중심으로 제작과 완성/유통 과정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제작과정에서 거래 예약을 받더라도 이는 ‘완성’된 이후를 고려한 예약이다. 김용현 작가의 퍼포먼스와 영상설치 작품들은 이러한 과정을 와해한다. 회화를 전공했던 작가는 ‘매일매일 다른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추상화를 그렸다고 회상했다. 작가에게 추상화는 매일 다른 여러 그림들이 레이어처럼 켜켜이 쌓아 이루어진 하나의 화면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최근 작업들에서 하나의 ‘완성’을 목표로 한 작업과정을 와해시키는 특성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다. 작가가 최근 주로 다루고 있는 퍼포먼스와 영상 매체는 개별 작품인 동시에 같은 개념을 공유한 시리즈이며, 작품 제작의 연속선상에 함께 놓여있다.

 

김용현 작가의 퍼포먼스는 일상에서 도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정해진 시간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영상으로 기록되기 위해 수행된다. 그리고 작가는 영상작업과 같은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을 통해 누적된 그의 퍼포먼스 장면들을 재료 삼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연출한다. 이처럼 퍼포먼스부터 영상과 설치까지, 다양하게 변모한 작품들은 작가가 도출한 아이디어를 함께 견인한다. 여기서 ‘선행된 퍼포먼스’들은 주요 작품보단 그의 아이디어를 작품화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작가노트와 더불어 작품에서 그의 메시지를 독해하는데 보조적인 수단인 서브텍스트가 된다. 일상적인 장소에서 수행하는 김용현 작가의 ‘선행된 퍼포먼스’는 그 곳에 그 시점에 방문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직접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수집된 파편적인 이미지 소스-재료로 치환된다. 그리고 이 ‘재료’들이 어느 정도 누적되고 이를 전시로 선보일 기회가 왔을 때, 작가는 편집을 통해 영상작품을 생산한다. 해질녘 거리에 불이 켜지는 타이밍을 노리고 수행한 <key man>(2018-2019), 계단, 벤치, 도로 경계석 등 작은 높이에서 굴러 떨어지는 <추락 없는 낙하>(2020)와 같은 작품들은 수차례의 퍼포먼스들을 기록한 영상들을 반복적으로 조합해 그가 수행해온 ‘행위들’을 더욱 강조한다.

이러한 재조합의 결과물이 영상의 형태가 아닌 제 3의 퍼포먼스인 경우도 있다. 이는 김용현 작가가 관객에게 선보이기 위해 기획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에게 친숙한 구절들을 유머러스한 체험으로 생경하게 제시한 <세상에 웃길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2021)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에서 라이브로 진행된 이 퍼포먼스는 지나간 유머를 실시간 타이핑한 <일그러진 웃음>(2020)와 장소와 행위의 괴리를 통해 장소에 덧씌워진 맥락을 해체한 <아예 박살을 내버리면 어떨까>(2022)의 행위가 라이브로 결합된 형태이다. 이렇듯 김용현 작가의 ‘선행된 퍼포먼스’들은 개별 작품인 동시에 재료가 되어 언제든 작가의 선택과 판단에 의해 재조합 될 수 있다. 이듬해 <아예 박살을 내버리면 어떨까>(2022)는 독립적인 작품으로써 영상으로 편집되어 그림바위 예술발전소와 예울마루의 전시들에서 서로 다른 작위적인 디스플레이로 설치되었다. 이는 ‘선행된 퍼포먼스’ 이후, 퍼포먼스 혹은 영상작품으로의 포스트 프로덕션은 언제든 연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처럼, 김용현 작가의 작품에서는 ‘퍼포먼스가 우선이냐, 영상이 우선이냐’라는 질문이 무의미하다. 그 모든 작품의 형식과 전시된 환경은 관객들에게 작가의 메시지와 태도를 잘 전달하기 위해 매번 다르게 선택될 수 있다. 

<세상에 웃길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2021)를 다시 살펴보자. 김용현 작가는 타이핑하는 행위에서 관객을 등지며 그들을 방치했다. 관객은 실시간으로 작성되고 삭제되는 그의 타이핑 텍스트와 맞은편 유리창 너머 두 사람이 일종의 몸개그처럼 수행하는 폭죽놀이-불장난 사이에 끼어있었다. 이후 그림바위 예술발전소의 초대전에서 이 작품을 영상 설치로 변환했을 때 역시, 그는 서로 마주한 두 벽에 텍스트의 타이핑 화면과 폭죽놀이-불장난 모습을 동시에 상영해 전시장 중앙의 관객들이 두 영상작품 사이에 낀 환경을 연출했다. 이러한 ‘산만한 환경’ 속에서 관객은 시선을 교차해가며 최선을 다해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를 읽어내려 애쓰게 된다. 혼란스러운 그러나 관객이라는 역할을 마지막까지 수행하려 애쓴 그들을 포함해, 작가는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한다.

유머 레퍼토리, 시대적 감수성, 표지판의 지시어, 버려진 사물, 사회적 규범, 이동하는 갈대 등과 같이 김용현이 선택한 작품의 소재들을 나열해보면,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그 소재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일상을 둘러보는 그의 시선은 반골(反骨, rebel) 기질을 엿볼 수 있지만 어딘지 소박하다. 작가는 작품에서 청개구리 같은 장난스런 행동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그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실제 작품에서 작가는 그저 생각을 이어가는 과정이나 상황을 관객들에게 제시하며 한걸음 물러선다. 그의 질문은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지나치던 것이기에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분명 그 질문들은 우리가 간과한 무언가를 꼬집는다. 이는 작품의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과정을 추적하다보면 이해하기 쉽다. 영상작품 <당신이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2021-2022) 역시 평화문화진지의 방문에서 시작된다. 김용현 작가는 이 장소가 가진 정체성과 설립의 명분인 ‘평화’와 ‘생태’가 여전히 유효한지 질문한다. 그곳에 방문한 사람들은 ‘평화’와 ‘생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곳을 방문함으로써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평화’를 얻으려 하고, 그곳의 자연이 가진 ‘생태’를 이해하며 보존하려 하는가? ‘선행된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평화문화진지의 잘 조성된 조경과 길 위의 휴게 벤치에 앉아 방문객들이 산책하는 행위를 지켜본다. 평화문화진지를 거니는 사람들은 ‘평화’보단 일상에서 여유롭게 공원을 거니는 ‘산책’에 집중한다. 그들은 그 곳이 평화문화진지가 아닌 일반적인 도심 속 공원이었어도 마찬가지로 ‘산책’할 것이다. 여기서 김용현 작가의 행위가 시작된다. 그의 퍼포먼스는 작가 본인이 주요 시연자가 된다. 벤치에 앉은 작가는 길의 양끝을 바라보며, 누군가 자신이 위치한 지점으로 다가오면 일어선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자신의 앞을 지나간 후에 다시 벤치에 앉는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을 인식하고 이를 작은 행위로 옮긴 작가의 상호작용에 아무런 관심을 표하지 않고 자신의 ‘산책’을 이어간다.

이처럼 김용현 작가는 우리가 무신경하게 용인하고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같은 개념을 공유한 각각의 작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제시한다. 작가의 질문들은 문제의식을 강조하며 적극적으로 비판하기보단 상황을 비트는 유머로 관객들에게 스며든다. 관객은 일반적으로 현대미술이 제시하는 날이 선 질문에 당장 자신의 입장과 답을 정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유머러스한 상황과 괴리감으로 제시되는 김용현의 질문 앞에서는 관객의 판단이 유예된다. 관객은 지연된 시간만큼 질문을 탐색하고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작가의 유머감각은 관객들이 작품의 메시지에서 질문 그 자체를 집중하고, 이미 비틀린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작가의 질문들은 같은 개념을 공유한 여러 새로운 작품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제시될 것이다. 앞으로 잊을 만하면 새롭게 다시 찾아오는 유행이나, 꾸준히 사랑받는 공연의 레퍼토리처럼 서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기대해본다.

​독립 큐레이터 김미교

 

 

 

 

 

 

 

 

 

 

 

 

 

 

 

 

 

‘맞는 이야기야’

김정현 미술비평가, 독립큐레이터

 

That’s True

Kim Junghyun, Art Critic & Independent Curator 

 

  미술관의 전시실에서는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작품해설사가 한 무리의 관객을 끌고 돌아다닐 때면 수런거리는 울림은 있지만 크게 웃거나 떠드는 것은 대체로 관람 매너에 어긋난다. 가끔 이런 장소가 낯선 어린 아이들이 칭얼대며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런 소란은 부모나 관리자의 가르침으로 해소될 일시적인 상태로 여겨질 뿐이다. 그 동안 주로 미술관 바깥의 길, 옥상, 바닷가 같은 곳에서 사회적 또는 지형적 안무를 발견하고 비트는 1인 퍼포먼스를 펼쳐온 작가 김용현은 관람의 관습이 작동하는 미술관에 들어오면서 웃음의 코드를 탐구하기로 한다. 미술관은 웃음이 예외적으로 억압된 곳이다. 이곳에서 웃는 행위와 웃음소리는 ‘관람 매너’라는 규칙에 함축된 권위주의와 엄숙주의에 저항하는 의미를 지니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제목을 통해 ‘세상에는 웃길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라고 ‘웃을 수 없음’을 선언한다. 물론 그저 역설적으로 웃기는 말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있는 그대로 읽었을 때의 이중성을 따져본다. 웃음이 관습적으로 억제된 공간에 대한 의식, 그리고 웃음의 코드가 실패하는 순간과 상황에 대한 관심.  

 

    People tend to be quiet in the gallery of a museum. There could be some noise made by a group of visitors led by a museum docent. But it would be ill-mannered to laugh aloud or make much noise in the museum. Sometimes little kids who are unfamiliar with this place may whine without controlling their voice, but such a noise is regarded as a temporary situation to be solved following the instructions of their parents or museum staff. Kim Yong Hyun, who has discovered social or topographic choreography in such places as a rooftop, beach and road outside the museum and has presented a one-person performance with a twist, intends to explore the code of laughter, entering the framework of a museum where customs operate. A museum is an exceptional place that suppresses laughter. In this place, the act and sound of laughing can be a kind of resistance to authoritarianism and solemnity implied in the rules of the ‘museum manner.’ However, Kim announces that ‘it is not possible to laugh’ through the title There could be a thing that can not make it laugh. It can simply be a paradoxically funny expression, but what is notable here is the duality of the phrase when read literally: a recognition of the space where laughter is conventionally suppressed and an interest in moments and circumstances in which the code of laughter fails. 

 

  2021년 12월 4일과 5일 대낮, 경기도미술관 로비와 유리창 너머 분수대로 이어지는 공간에서 펼쳐진 김용현의 퍼포먼스를 복기해보자. 그 중 나는 두 번째 날에 감상했고, 글을 쓰기 위해 관람하는 틈틈이 작업의 구조뿐 아니라 관객의 시선에 대한 메모를 남겼다.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1인 퍼포먼스 형식에서 벗어나 퍼포머를 섭외하고, 독특한 공간적 구조를 이용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의 방향을 통제할 수 없는 변칙적인 환경에서 라이브로 전개하는 작업. 종종 퍼포먼스의 미학을 결정하는 우연적인 것들에 작업의 구조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인가. 제목을 통해 유머의 실패를 선언하고 기정사실화한 것이라면 웃음의 코드는 이 작품의 수행적 미학에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된다. 코드의 작동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작업은 웃음에 관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      

 

    Let’s recall the performance of Kim Yong Hyun held in the middle of the day on 4 and 5 December, 2021 at the museum lobby and the outdoor place leading to the fountain over the window. I saw the performance on the second day, taking notes on the views of the audience as well as the structure of the work. In this performance, Kim invited performers unlike his signature one-person performance format and presented a live performance in an irregular environment where the directions of the audience's gaze are out of control by using a unique structure of space. How will the structure of the work (be able to) respond to accidental elements that often determine the aesthetics of performance? If the artist announces the failure of humor and makes it a done deal through the title, the code of laughter has nothing to do with the performative aesthetics of this work. What questions and attitudes does this performance have about laughter, if it does not test the possibility of operating the code?

 

  김용현의 퍼포먼스 <세상에는 웃길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대형 모니터 두 대와 작은 모니터 두 대, 그리고 그 사이 테이블에 세팅된 노트북 한 대가 놓인 가벽 무대. 이 작업은 작가가 등장하여 관객을 등지고 타이핑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상투적이거나 다소 과장된 인사말과 함께 작은 폭죽을 터트리며 퍼포먼스의 오프닝을 신호한 후 명랑한 구어체로 기묘하게 이어지는 대사를 나열한다. 무언가 볼거리를 기대하며 관객이 숨죽이고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사운드 효과로 타다닥, 탁탁, 찡- 하는 타자기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리고, 퍼포먼스가 열리는 로비의 유리창 너머에는 아직 아무의 관심도 끌지 않은 작업복 차림의 2인조는 테이블이나 소품을 들고 오가며 부산하게 움직인다. 

 

    In his performance, There could be a thing that can not make it laugh, there is a free-standing wall stage equipped with two large monitors, two small monitors and a table with a laptop on it. The performance begins with Kim typing with his back to the audience. After signaling the opening of the performance by setting off a firecracker and greeting the audience in a conventional or somehow exaggerated way, he types the dialogues in a cheerful colloquial style, continuing oddly. While the audience pay attention, holding their breaths and waiting with anticipation, they can hear the sound effects of a typewriter like tadadac, tactac and clink on a regular basis. Meanwhile, beyond the window, a pair of performers dressed in work uniform bustle around carrying a table or props without attracting any attention from people yet. 

 

  한겨울이라 물을 채우지 않은 미술관 건물 둘레의 분수대 너머 멀리에는 화랑지 산책로를 오가는 행인들이 보인다. 유모차를 끌고, 겨울옷을 입고, 앞을 보고 천천히 걸어가는 산책자들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실내의 관객들과 분리된 공간을 누비며 시선의 평행선을 따라 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김용현은 타이핑을 계속한다. 글만으로도 경쾌함이 전해지는 구어체 표현의 언어가 흐르고, 개그 콘서트 풍의 후렴구로 간단히 맞장구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화면에 떠오른다. 누구나 어디서 들어봤을 법한 지루하고 뻔한 말을 먼저 차근차근 타이핑 한 후, ‘맞는 이야기야’라는 미리 입력해둔 짧은 문장을 붙여 넣는다. 찡, 줄 바꿈하는 소리가 울리고, 다시 반복. 

 

    Far in the distance over the empty fountain with no water during the midwinter season surrounding the museum building, there are people walking along the trail of the Lake Hwarang. The gazes of people on the promenade in winter clothes while pushing strollers or walking slowly with their eyes straight ahead are in parallel with those of the audience staying inside the museum, separated by the window. In the meantime, Kim Yong Hyun continues typing. Language in a colloquial expression, whose text itself is cheerful already, and simple words of agreement using a refrain in a Gag Concert style appear on the monitors repeatedly. He types words that sound boring and cliche, which anyone may have heard before, one by one and then pastes a short sentence he already input saying ‘That’s true.' There is a clinking sound of moving to the next line. Then repetition again. 

 

  대본의 어느 시점부터인가는 알 수 없지만, 퍼포먼스가 적당히 서론을 끝냈다 싶은 시점, 유리창과 인접한 야외 데크에서 키가 크고 작은 두 사람이 이쪽, 실내를 향해 정자세를 취하고 선다. 준비. 실내에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관객의 시선이 무심코 이들에게 돌아간다. 두 사람은 폭죽 놀이를 시작한다. 각자의 머리 위에 고정하거나 손바닥 위에 올린 폭죽이 터진다. 소리 없이, 전원이 끊긴 분수대의 마지막 물길처럼 맥아리 없이, 몹시 짧게. 별로 화려하지 않은 폭죽의 불꽃이 일었다 소멸했다 하는 장면에 부모님을 따라 온 걸음걸이도 어색한 어린 관객들은 온통 신경을 빼앗긴다. 신기한 장면에 손을 뻗으려는 듯 가능한 가까이 다가선 어린이들은 양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딛고 지문을 남긴다. 그러고 보면 미술관의 유리창은 스파이 미러라 외부에서 내부를 꿰뚫어볼 수 없는데, 이렇게 한껏 경계에 다가선 관객들은 유리창-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마주하고 준비한 순서대로 폭죽 퍼포먼스를 시연하는 2인조 퍼포머에게 문득 보이지 않는 관객의 존재를 알리며 예기치 않게 개입하게 된다. 

 

    From a certain moment of the script – I am not sure which moment exactly - , which gave an impression that the introduction of the performance seemed to end, a tall man and a short man on the outdoor deck next to the window stand facing inside while maintaining a correct posture. The audience who lost their concentration in the indoor space unconsciously turn their eyes to them. The two performers start to show fireworks. Firecrackers fixed and placed on their head or palms go off. Little kids who have come along with their parents are totally fascinated by the sparks of fireworks appearing and disappearing, even though the fireworks are not very spectacular or powerful just like the last streams of the fountain turned off, lasting for a very short moment without sound. Kids approaching the window as closely as possible, as if stretching out their hands to this interesting scene, touch the window with their two palms, leaving fingerprints on it. In fact, the window of the museum is a spy mirror, so it is impossible to see through the inside from the outside. The audience approaching the border as closely as they can see themselves reflected in the window-mirror and announce the presence of an invisible audience to this duo presenting a firework performance in an orderly manner, thereby being involved in it unexpectedly.

 

  폭죽이 또 하나 터졌다 꺼진다. 대부분의 (성인) 관객들은 폭죽이 꺼지는 순간 다시 가벽 무대로 고개를 돌려 모니터에 떠오른 텍스트를 따라가려 노력한다. 점점 드라마틱해지는 폭죽 퍼포먼스. 2인조는 이제 단순히 몸의 여기저기에 고정한 폭죽을 터트리기만 하지 않고, 폭죽이 마치 로케트라도 되는 것처럼 불꽃의 반대 방향으로 반작용해 물러나는 시늉을 한다. 예를 들어 손바닥에 고정된 폭죽이 바닥을 향해 터지면 의자에 움츠리고 앉은 두 사람은 천천히 일어난다. 폭죽이 팔이든 다리든 인간의 몸을 밀어낼 만한 동력이 아니란 것은 (일반) 관객에게는 너무도 명백하고, 이런 식의 몸 개그는 진지한 예술이 기대되는 미술관에서 보기에는 아마도 의외의 것인 탓에 의외로 손쉽게 사람들을 웃기고 만다. 이 단순-드라마틱한 장면이 펼쳐지는 동안 산책로의 행인들의 시선의 궤도가 조정된다. 실내에서 바깥의 퍼포머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문득 분수대 너머 이곳, 퍼포머의 어깨너머 실내로 향하는 행인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평행하던 시선이 퍼포머의 신체를 소실점으로 모이는 구도.  

 

    Again, a firework explodes and fades away. Most of the (adult) audience try to follow the texts appearing on the monitors by turning their heads to the free-standing wall stage again at the moment the fireworks fade away. Firework performance is getting more dramatic. The two performers not only set off firecrackers fixed to several parts of their bodies, but also pretend to move back to the opposite direction to the sparks as if a firecracker were a rocket. For example, when a firecracker fixed on the palm sets off towards the floor, the two sitting crouched on the chair stand up slowly. (General) audiences obviously know that firecrackers do not have the power to push the human body, be it an arm or a leg. Since such a slapstick show performed at a museum may feel unusual, it makes people laugh more easily than expected. While this simple and dramatic scene unfolds, the trajectory of the eyes of the spectators on the promenade is adjusted. Those watching the performers while staying inside suddenly come to be conscious of the people outside over the fountain, whose gazes are directed inward over the performers’ shoulders. The eyes that were in parallel with each other converge to the bodies of the performers, taking it as a vanishing point. 

 

  다시 (어른) 관객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맞는 이야기야’. ‘정치인’, ‘경로당’, ‘우리의 역사를’. ‘국가 대표는’ 등의 파편적인 단어가 드문드문 눈에 들어온다. 이미 산만해져버린 관객에게 모니터에 떠오른 문장은 의미를 상실한 기표로 다가온다. 어느 덧 명백한 마지막 대사. “다 맞는 이야기밖에 없지? 근데 이것들은 다 농담이야!” 무언가 맞장구치기 좋지만 별로 기억에 남지 않은 대사들이 20여분 동안 지나갔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작가는 벌떡 일어나 퇴장한다. 아직 퇴장하지 않고 대기 중인 야외의 퍼포머. 문득 타이피스트-퍼포머-아티스트 김용현이 나타나서 3인조가 된다. 마지막 폭죽을 터트리며 퍼포먼스의 엔딩. 먼저 행인들이 다시 제 궤적으로 돌아가고, 로비의 관객이 몇 자리를 뜨고, 남은 관객들도 출연자들의 인사가 끝나고 흩어진다.

 

    The (adult) audience turn their heads again. Some fragments of words including ‘That’s true,’ ‘politician,’ ‘community center for the elderly,’ ‘our history’ and ‘national team’ catch my eyes from time to time. To the audience who already got distracted, the sentences appearing on the monitors seem like signifiers whose meanings are lost. Finally, the last obvious dialogue: “These are all true, aren't they? But all of them are jokes though!” While I was thinking I heard the dialogues, which provoked reactions of agreement but were not really impressive,  for some 20 minutes, the artist stood up and left the stage all of a sudden. The performers in the outside are still on standby without leaving. Kim Yong Hyun, a typist, performer and artist, suddenly appears and they become a trio. The three of them end the performance by setting off the final firework. The bystanders go back to their trajectory first and a few spectators at the lobby leave the place. Then the rest of the people also begin to scatter after the final greetings from the performers. 

 

  특정한 시공간에서 펼쳐진 인간의 행위를 포함한 복합적인 이벤트를 글로 아무리 자세히 묘사해 봤자 많은 요소들이 필연적으로 누락되고 만다. 언어적 표현이 직선적이라면 신체적 표현은 공간적이다. 즉, 더욱 더 복잡한 차원을 포괄하는 신체 매체의 특성 상 언어 매체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없다. 특정한 것을 선택적으로, 선택함으로써 강조할 뿐이다. 김용현이 타이핑 퍼포먼스에 사용한 대본은, 대본의 역할이 의례 그렇듯 행위적 수행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위와 같은 복기하는 타이핑과는 전혀 다른 맥락을 지닌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작성한 대본의 내용이 ‘개그 콘서트’와 같은 익숙하고 상투적인 코미디 형식이므로, 행위의 차원에서 사전적인 대본보다 사후적인 기록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대본 형식의 글은, 대본이 전제하는 인간의 발화와 행위를 통한 수행에서 벗어나, 글 자체로 전달될 때 (드물게 그 자체로 문학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현저하게 납작해져버리고 만다. 즉, 김용현의 타이핑 퍼포먼스는 코미디의 효과를 의식적으로 억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Many elements are to be inevitably omitted, even if I try to fully describe a complex event including human actions taking place in a certain space and time in detail. If verbal expression is linear, physical expression is spatial. In other words, a verbal medium cannot record it ‘as it is’ because the medium of the body includes an even more complex dimension; the verbal medium chooses certain things selectively and emphasize them. The script that Kim used in his typing performance is premised on behavioral performance as the script basically has such a role. Therefore, it has a totally different context from typing which reviews. On the other hand, however, the content of Kim's own script is in a familiar and conventional comedy format like ‘Gag Concert.’ As a result, it looks like a follow-up record rather than a preliminary script in terms of action. When the text in the form of a script is delivered as text itself escaping from an execution through speaking and acting of humans on which the script is premised, what it intends to express is crushed flat remarkably (although there are rarely things with literary value in themselves). That is, the typing performance by Kim Yong Hyun appears to intentionally suppress the effect of comedy. 

 

  작가는 ‘웃음’을 주제로 한 또 다른 작업 <일그러진 웃음>(2020)에서도 타이핑 퍼포먼스를 택했다. 한물 간 유머집을 발췌해서 실시간으로 타이핑해서 보여주는 작업은 시대착오적인 유머의 내용에 한층 더 거리를 둔 감상을 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헛웃음을 낳거나 결코 웃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으로서 ‘유머’를 논한다. 이렇게 ‘웃음’은 ‘유머’와 분리된다. 이와 관련해서 이번 작품계획서에 적힌 작가의 말을 참고해보자. “웃음이 상실된 유머 속 내제된 두려움의 단면과 사회 속에서 행해지는 우리의 행동들을 관객과 함께 조우하고자 한다 (...) 유머에는 세상에서 도태되고 싶지 않은 두려움 (...) 마주하기 힘든 공포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 기재가 숨어있다.” 웃음을 유예시키거나 삭제하고 나면 유머의 심리적 동기가 강조된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관심은 웃음을 지나쳐 인간의 정신분석학적 욕망으로 향하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그가 웃음을 유머에 거의 순응적으로 반응하는 표피적인 현상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웃음을 낳는 방법보다는, ‘더 이상’ 웃을 수 없는 이유를 상기한다.

 

    In A Twisted Laughter(2020), another work dealing with the theme of ‘laughter,' Kim also chose a typing performance. In it, he extracted some passages from an outdated collection of humor and typed them in real time. Encouraging the audience to keep more distance from the content of anachronistic humor when seeing it, he deals with ‘humor’ as something that causes silly laughs or no laugh at all eventually. In this way, ‘laugh’ is distinguished from ‘humor.’ In relation to this, we can refer to what the artist wrote in his art proposal. “I intend to encounter an aspect of fear inherent in humor without laughs (...) What is hidden in humor are a fear of not wanting to fall behind in the world, (...) a defense mechanism to cope with the fear which is hard to confront." When laughter is suspended and eliminated, psychological motivation is emphasized. Ultimately, his interest seems to go towards psychoanalytic human desire beyond laughter. On the other hand, it seems he depicts laughter as a superficial phenomenon that responds almost adaptively to humor. Kim reminds us of the reason why we cannot laugh ‘anymore’ rather than a way of creating laughter. 

 

  이번 작업에는 그러한 긴장감을 상쇄하는 카운터 퍼포먼스가 병행된다. 전면 유리 창문을 통해 미술관과 공간적으로 단절되고 분리된 야외에서 2인의 고용된 퍼포머에 의해 펼쳐지는 비언어적 슬랩스틱 코미디는 단순 명료한 설정으로 꽤나 편안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웃음, 유머, 또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작가의 사고에 있어 언어적인 표현과 신체적인 표현의 차이가 그만큼 큰 것일까. 작가는 두려움에 대한 방어 기제에 주목하지만, 웃음과 유머는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을 넘어 사회적인 차원에서 저항과 전복의 힘을 지니는 행위가 되기도 하다. 먼 옛날 흑인 노예의 웃음이 백인 주인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타이핑 퍼포먼스와 대비되고 대칭되는 구조의 슬랩스틱 코미디가 불러일으키는 웃음이 모종의 저항적 효과가 있다면 그 대상은 무엇일까. 그저 미술관에서 관객을 웃기는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먼저 두려움을 말하고 난 다음에 우리를 웃게 하는 것들에 관해서는 조금 더 질문하게 된다.    

 

    In this work, a counter-performance which offsets such a tension is added. Nonverbal slapstick comedy performed by the two hired performers taking place in the outdoor space disconnected and separated from the indoor space of the museum by full glass windows provokes comfortable laughs with its simple and clear setting. There may probably be a big gap between verbal expression and physical expression in his thoughts of laughter, humor or human desire. Laughter and humor become an act with the power of resistance and subversion on a social level beyond something individual and psychological, just as a black slave’s laughter gave a feeling of an inexplicable fear to a white master in old days. If laughter caused by slapstick comedy with a structure providing contrast and symmetry with the typing performance has a sort of effect of resistance, then what will be the object? Doing an act of making the audience laugh in a museum may not be enough to create a meaning. But things that make us laugh ignite more curiosity and questions, when followed by talking about the fear first. 

 

 

세상에는 웃길 수 없는 것들도 있기마련이다.​

 

하나.

남을 웃기는 말이나 행동, 우스개, 익살 등을 유머, 개그, 위트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에게는 재미있다, 위트 있다. 유머가 있다.라고 한다. 그 어느 누가 위트 있고 유머 있는 사람을 싫어할까? 이 단어에는 무한한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유머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통찰력, 약간의 지식, 순발력, 센스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을 대책 없이 구사하다가 실패했을 때 되돌아오는 리스크는 너무 크다. 웃기지 않은 개그와 센스 없는 위트, 징그러운 익살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얼마나 쓸모없는지 모두가 알 것이다. 난 이런 위트 있고 유머에 가득 찬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니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웃길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웃길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작업은 세상 모든 것이 위트와 유머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에서 시작했다. 이 작업은 과거와 현재의 블랙코미디 리서치를 통해 유머의 사회적 의미를 찾고 이런 세상에서 계속 실없는 농담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알기 위한 작업이었다. 인간ㅇ은 그 어떤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농담을 통해 현재의 비극을 극복해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일부 지식인들은 현실감각을 결여시키는 저급한 활동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현실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됐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과거와 현재까지의 유머집, 블랙 코미디, 스탠딩 코미디를 리서치 하고 나름의 분석을 진행하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유머 안의 내용이 동시대성이 반영되지 않으면 그 유머, 위트, 블랙 코미디는 어떤 힘도 내지 못하다는 것 이다. 옛날 이야기하는 선배나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지루한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에는 젊은이가 느낄 수 있는 동시대적 유머감각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린 점점 늙어가면서 재미없어지는 것에 대해 너무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된다. 

블랙 코미디, 슬랩스틱 유머가 될 수 있는 요소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내러티브의 파괴(이야기의 불확실성) 생산구조의 모순(과밀 정밀한 과정에 비한 초라한 결말), 행동의 연속성을 분절 시키거나 각각의 행동의 연결 과정을 과도하게 연장하거나 축소를 중심으로 유머는 만들어진다. 나는 이런 요소와 구조들을 동시대 코미디 보다 동시대에서 횡횡하는 메시지와, 슬로건에서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진정한 유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sns에서 개그 콘서트와 스탠딩 코미디가 망하는 이유를 ‘이놈의 세상이 더 웃기다’라는 글을 발견할 때 마다 나는 매우 동의 한다. 이제 진짜 코미디는 화면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만들어 지고 우리의 일상은 블랙코미디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웃길 수 없는 것들로 우리 눈 앞에 있다.

넷 

제목 세상에는 웃길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There could be a thing that can not make it laugh 

 

 

One. 

Words or behaviors, jokes, and clownery, making people laugh, are called humor,
gag, and wit. We call those who have a good command of such things 'witty' and 'humorous.' Who can hate a witty and humorous person? There is just infinite positivity in these words. A high level of insight, some knowledge, extemporaneousness and sense are required to be a man of humor. However, if a reckless use of humor fails, the risk coming back is so high. A gag that is not funny, a wit devoid of sense and a gross joke―needless to say all of us probably know how useless these things are. I wanted to be a person who is full of wit and humor. I would say I made a ceaseless effort to be so. I also believed this world is filled with things that can make us laugh. 

 

Two. 

There could be a thing that can not make it laugh originated from the idea that everything
in the world can be a subject of wit and humor. During the course of my research on
black comedy from the past to the present, I thought I could find the social meanings
of humor. It was also a process of finding out the reason why such silly jokes have
continuously been made in this world. Everyone knows humans have made efforts not  to lose laughter at any moment and have overcome the present tragedy through jokes even in a very desperate situation. There are some intellectuals who criticize it as a low-grade activity lacking a sense of reality. But it is also meaningful if it can be the driving force to maintain the reality in its own way, isn't it? One thing that I discovered from my research and analysis on humor books, black comedy and standing comedy from the past till now is that the humor, wit and black comedy do not exert power if the content of the humor does not reflect the contemporary realities. What the elderly or those who enjoy telling old stories say sound boring because there is no contemporary sense of humor that young people can empathize with in these stories. Therefore, we don't have to be too afraid of becoming a boring person as we get older. 

 

 

Three. 

The elements to be black comedy and slapstick humor are: destruction of narrative(uncertainty of a story), contradiction of production structure(a humble ending compared to an excessively precise process), interruption of the continuity of action or an excessive extension or reduction of the process of connecting each action. Those elements and structures were found more in contemporary messages and slogans, which I think close to true humor, than in contemporary comedy. Whenever I read comments on social media saying "Gag Concert(a TV comedy show) and standing comedy fail because 'this world is funnier,' I can't agree more. Now real comedy takes place not on the screen but in our everyday lives; it takes the form of black comedy but is full of things that can not make it laugh. 

 

 

Four. 

As the title says, there could be a thing that can not make it laugh 

 

 

짧은 자유 낙하 

 

차도에 하얗게 칠해진 글자 ‘천천히’는 그것을 표시한 의도인 ‘차를 천천히 모세요’로 보통 읽힌다. 그러나 그렇게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라는 표시를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천천히 뭐? 천천히 어쩌라고? 지금 나보고 천천히 걸으라는 거야 뭐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관점은 당장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해야하는 운전자보다는 언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천천히’ 고민해볼 수 있는 산보객에 의해서 얻어질 때가 많을 것이다. 김용현의 <Take a walk 산책> 연작은 작가와 사물이 맺는 관계를 전면적으로 보여주지만 사실은 작가가 언어와 맺는 관계를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직접적으로 언어와 맺는 관계가 드러나는 장면도 적지만 있다. 경고문구가 들어 있는 안내판에 작가가 손을 대는 장면이다). 그 이유는 이미 사물들은 언어의 공간 속에 있는 한에서 사물이기 때문이고, 작가는 그 사물들의 배치를 다시 의미의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울타리가 있다고 하면, 울타리가 세워질 때의 의미는 ‘이곳을 넘어가지 마세요’였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울타리가 일정 높이를 갖고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울타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려고 한다: ‘저를 붙잡고 넘어가세요.’ 그리고 마침 울타리는 그렇게 붙잡고 넘어가기 좋은 높이이다. 울타리는 직접 영상에서 나오기도 하는 사물이면서 다른 사물들을 대표한다. 사물과 그에 대응하는 작가의 신체는 계속 이런 진행을 따른다. 

 

1. 사물이 원래의 용도 또는 우연적 결과에 따라 배치되어 있음(이 배치는 의미적으로 기능함).

2. 작가가 신체를 이용하여 그것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함(신체든 사물이든 기하적이라는 점에서 동기화 가능함).

3. 사물이 2의 과정으로 얻어진 의미를 위해서 그러한 배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

4. 다른 사물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확인하러 떠남. 

 

이런 태도는 ‘천천히’ 표시와 같은 단어들을(또는 문장들을) 얼마든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사물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이다. <추락 없는 낙하 A fall without crash> 역시 작가가 같은 입장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높이를 가진 사물들 위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굴러 떨어진다. 원래는 각기 다른 용도에 따라 특정한 높이를 갖고 배치되어 있는 사물들(차도와 보도를 구분하는 연석, 얕은 도랑, 벤치, 그리고 무엇보다 계단)이 모두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려 한다: ‘저로부터 제 높이에서 떨어지세요’ 그 사물들의 또 다른 공통적인 특징은 떨어져 죽지 않을 정도의 높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퍼포먼스 비디오이고 그렇기 때문에 떨어져 죽을 정도의 높이의 사물에서 떨어지는 장면 또한 얼마든지 계속해서 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의미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일정한 높이를 가진 요철 그 자체이지 그 정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퍼포먼스 비디오는 다큐멘터리적이라기보다 다분히 연극적인데, 작가와 사물, 오직 둘 사이에 암묵적인 대화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만큼 연극적이기 때문이다. (“제 높이에서 떨어지세요.” “네.”) 스크린을 꽉 채우는 사각의 프레임이 아닌 양 옆 끝이 곡선으로 깎인 프레임은 오페라글라스의 시야처럼 보임으로써 그런 연극성을 강조한다.

 

이 작품의 끝을 이루는 계단 장면은 작가의 태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계단은 단이라는 사물이 같은 높이로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단들이 모인 계단 전체의 높이는 높지만, 하나하나의 단은 그렇지 않다. 김용현이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계단의 모습처럼 연쇄적인 낙하를 불러일으키지만 추락하는 것은 막는다. 그 태도는 사물이 완전히 자의적인 의미를 띔으로써 한 인간을 집어삼키게 되는 것을 막으면서 사물이 새로운 언어적 가능성을 여전히 보유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자유를 또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홍승택-

A Short Free Fall

The word “slowly” painted in white on the roadway is usually read as “drive the car slowly,” the intent of the text is clear. However, it's not the only way the word can be read. Viewers can experience this by looking at the sign ‘slowly.’ “Slowly what? What do I do ‘Slowly’”? Ironically, this point of view will often be acquired by walkers who can think ‘slowly’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and objects, rather than drivers who must move quickly to their destination. Kim Yonghyun's <Take a Walk> series fully demonstration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rtist and objects, but in fact, it is also correct to say that it demonstrat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rtist and language. (There are few scenes where the relationship with language is directly revealed. There is the scene where the artist touches a sign with warnings). This is because objects are already objects as long as they are in the field of language, and the artist tries to understand the arrangement of the objects in the dimension of meaning. If there were a fence on the street, the meaning when the fence was erected would have been ‘Do not go over here.’ However, when the artist sees that the fence is erected at a certain height, he tries to imagine that the fence is saying: ‘Hold me and pass over.’ And lastly, the fence is a good height to hold and pass over. When projected directly from a video, a fence represents other objects. The artist continues to follow this process using his body to respond to the object.

 

1. Objects are arranged according to their intended use or accidental consequences (this arrangement functions semantically).

2. The artist newly understands the meaning of it by using the body (it is possible to synchronize the body or the object in that it is geometric).

3. Make things appear to have such an arrangement for the meaning obtained by the process of 2.

4. Set off to see if other things can do that too. 

 

This is an attitude that treats things in the same way, just as words (or sentences) such as 'slowly' can be understood differently based on their context. I think A fall without crash is also the work created by the artist in the same position. On objects with relatively low heights, the artist intentionally rolls over. Originally, I would think that objects (curbstones separating driveways and sidewalks, shallow ditches, benches, and, above all, stairs), were all arranged at a certain height for different uses were saying, “Fall from the height I have.” Another common feature of those objects is that they are so low that a fall will not be fatal. This work is a performance video, so it is possible to continuously produce scenes falling from objects that are high enough to fall and die. However, what is important to the artist is that a certain height that can function semantically is important, not a higher height. That is why there is no reason to have a scene falling from a high place. Nevertheless, this performance video is more theatrical than documentary. It is theatrical because it can be seen that there was an implicit dialogue between the author and the object. (“Fall from my height.” “Yes.”) Rather than the square frame that fills the screen, the frame with curved ends on both sides emphasizes such theatricality by resembling a view out of opera glasses. The staircase scene at the end of this work can be said to encapsulate the artist's attitude in the most succinct way. A staircase is a step in which objects called steps are continuously arranged at the same height. The height of the entire staircase where such steps are gathered is high, but each step is not. Kim Yong-hyun's attitude toward objects causes a series of falls, like a staircase, but prevents them from falling. That attitude prevents things from swallowing up a human being by expressing a completely arbitrary meaning. This allows things to still hold new linguistic possibilities. If not this way, how else can you get freedom? 

 

-Hong Seoug-tek

버려진 자전거는 어떻게 그 자유를 얻었을까?

파블로 네루다 “ 질문의 책”

 

 나는 보편적 행동규칙을 탐색하고,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 제공된 환경을 

이용하는 필수적 행동에 주목한다.

 인간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보행신호를 기다리고, 문을 열려고 시계방향으로 손잡이를 돌린다. 모두가 약속한 행동규범은 사회가 개인에게 보여주는 대규모 퍼포먼스의 일부분으로 보였다. 사회가 제공하는 규범과 행동양식은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모습도 있었지만 그 효율과 합리의 이득을 개개인이 가져가지 않았다. 새벽에 아무도 다니지 않은 횡단보도의 보행등은 누구를 위해 깜박거리고 있는지는 알길 없다. 인간 에게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 잡은 질서와 환경을 활용 하려고 실행하는 행동은 인간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이것은 개인과 사회를 구축 시키는 근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횡단보도 사거리 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약속한 신호에 맞춰서 출발하고 정지하기를 반복한다. 오른쪽 방향으로 길을 걷고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오르내린다. 핸드폰을 위아래로 드래그 하면서 읽거나 본다. 우리의 아주 작은 행동양식도 교육 속에서 익혀왔고 실행되고 있다. 이것은 사소하지만 잠재적 질서로 작용하고 고정된 흐름으로 유도하고 있다. 세상 안 밖에서 주체와 자유를 외치지만 인간의 일상은 공장 컨베이너 벨트처럼 분업화되고 기능과 효율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인간의 작은 움직임 중 개개인의 자유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행동은 무엇이 있을까?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은 어디서 생겨날까? 기능과 효율을 버린 움직임만이 개인에게 의미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행동인 것인가? 사회의 존재 이유가 개인의 행복과 주체적 삶에 반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다양한 시선에서 의미와 결과가 도출되고 그에 따른 시선도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내가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은 인간은 늘 최대치의 자유 속에서 살고 있고 일부를 제외한 많은 사람은 자신들이 꽤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물리적 자유를 제한하는 상태에서 변화를 꾀하였다. 물리적 이동과 생각의 자유를 개인에게 내어주고 사회는 공간과 이념, 자본을 점유하고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개인에게 요구한다. 인간은 노동을 하기위해 필요한 필수적 움직임이 있다. 이 움직임은 사회가 만든 제약된 환경에서 이용하게 되며 이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인간은 자유를 얻기 위해 노동한다.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으로 우린 자유를 획득하는가? 우린 노동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활동에 대해서만 보상을 받는다. 일자리로 이동하기 위해 필수적 이용해야하는 대중교통 이용, 문을 여는 등 일상의 작은 행동에 대한 보상은 없다. 이 부분에서 우린 계속 어긋난다. 노동의 댓가로 아무리 많은 돈을 받아도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적절한 보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일부분의 노동만이 사회에서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패턴을 강요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아니다. 노동이나 축제현장으로 가기 위해 인간이 필수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행동의 집합들 이것이 사회를 구축시키고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또 다른 댓가 였다.

 

나는 생활반경 과 익숙한 시각 이미지를 가진 이국적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퍼포먼스를 실행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해봤을 바닥에 새겨진 방향 지시대로 따라 걷기부터 길 위의 쓰레기를 정리하고, 공원 의자의 위치를 바꾸고, 넘어져 있는 사물을 일으켜 세우는 행동을 한다. 이런 행동은 거리의 경고판 일부를 가려 다른 지시를 만들거나, 의심 없이 따르던 사회적 지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이것을 조종하는 듯한 퍼포먼스로 실행된다. 풍력발전소의 프로펠러 속도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자동으로 켜지는 가로등과 간판, 조명을 손가락 하나로 조절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내리막길을 카트를 타고 내려가 바다에 빠지고,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자동차와 함께 걸어간다. 2017년부터 위 작업을 작은 단위 마을에서 시작했고 도시 국가 인종까지 더 넓은 단위로 작업을 진행하고 자 계획하고 있다. 서울, 경기도 및 지방 도시와 도서산간 대부도, 영흥도, 탄도 외에 한국과 유사한 문화권을 형성한 중국 연변에서 작업을 진행 하면서 한 인간이 가진 사회와 질서, 자유와 통제 내 외부를 살펴봤다. 이런 연구를 기반으로 사회 속에서 개인과 개인이 바라보게 되는 사회의 복합적 개념을 가진 영상 퍼포먼스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김용현-

 “I search for large-scale quotidian performances the society carries out.”

I search for universal codes of behavior in our human society. I pay attention to behaviors indispensable for using the environment given to the human society. To cross the street at a crosswalk, we wait for the green light and we turn the knob clockwise to open the door. These arranged codes of behavior look like large-scale performances that the society shows individuals. 

I create my works based on the method of doing performances by myself through video recording. I carry out performances carrying a camera and visiting different places such as cities and islands of Korea as well as China. My performances are realized in the following manners: I put trash on the street in order according to my standards, I change the position of benches of the park, I lift some fallen objects up, I point out the street warning signs, I move following the direction indication marked on the floor, I move my body in accordance with speed of the propeller of a wind power plant and I do some gestures as to manipulate the automatic streetlamp and glitter of lighting from standing signboards. Moreover, I go down the slope riding a cart and fall into the sea, and I suddenly get off the car and walk along the car. 

양면가치   

 

문득,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생물학적으로 완벽히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의지는 없으나 그것을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완벽히 사고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몸은 말을 듣지 않으나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정신에너지와 신체에너지는 일견 상반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우리에게 어느 한 쪽의 결핍이 일어난다면 그 즉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무형의 에너지는 그 존재를 가시화하기 위하여 사물이나 몸을 필요로 하고 몸은 기운氣韻이 있어야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움직임을 할 수 있다. 살아있기 위하여 요구되는 최소한의 숨을 쉬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는 다시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로 세분화해서 들어가게 되는 단초가 된다. 

 에너지는 형태를 넘어서지만 형태에 뿌리를 두어야 가시화할 수 있다. 작가 김용현의 화면에는 에너지를 가시화했다고 할 수 있는 형태가 있다. 이는 회화와 영상 두 가지의 장르를 통해 드러난다. 정지되어 있으나 작가의 에너지와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드러나는 회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으나 도구나 색감의 변이로 에너지의 교집합을 드러내는 영상은 전시의 타이틀 <양면가치兩面價値>를 보여주는, 접해있으나 명백히 다른, 또 하나의 양면의 가치를 담고 있다.

 사람의 감정에너지의 흐름을 보여주는 카를리안 사진기kirlian camera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신체에너지의 흐름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서 보면 색상의 왜곡은 있으나 어둠에서도 대상의 형체와 작은 움직임까지 기록할 수 있고, 열감지 카메라를 이용한다면 세심한 움직임은 몰라도 살아있는 생명체의 존재와 큰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카메라는 특수한 상황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에도 일반적인 신체가 내포하고 있는 에너지의 움직임을 시각화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미술분야에서 작가의 사고와 관념을 표현해내는 방법이야말로 눈빛과 움직임과 그 안의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도 않고 뚜렷한 형태도 없는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작가 김용현은 대학원 재학 중 에너지, 보이지 않는 기운을 표현하고자 다양한 방식들을 실험했는데 자신의 신체에 에너지를 표방할 수 있는 색을 칠하는 행위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본 전시에서 변화양상을 보이는데, 두 사람이 다른 색상을 칠할 얼굴과 발을 맞닿아 움직여 두 색이 섞여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움직임에 대한 어떠한 지시도 없이, 일단 맞닿은 얼굴과 발은 떨어지지 않고 영상이 끝날 때까지 마찰을 지속한다는 하나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각자의 움직임은, 양자兩者는 나름의 에너지를 하나의 원칙에 집중하고 이것은 색이 혼합되는 과정을 통하여 에너지의 가시화를 실현한다. 

 다른 하나의 영상에서는 푸른색 물감이 잔뜩 묻은 실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일상에서 비닐봉투나 혹은 엉긴 목걸이, 긴 끈을 풀 일이 있는데 이 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는 반드시 풀어내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어도 과정에서 우리는 쉽게 그만두지 않고 에너지를 쏟게 된다. 매우 단순하지만 이것은 에너지의 가시화를 아주 명쾌하게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입체와 설치 작업을 통하여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림자가 사물의 존재를 나타내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에 집중하기도 하고, 가구의 틈으로 가는 실이 흘러내리거나 새어나오는 형상을 통하여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를 시도해왔던 때부터 이 모든 작업에 관련한 드로잉을 그려왔다.(그에게 영상, 드로잉에서 드러나는 실은 가장 유연하게 에너지의 흐름이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오브제이다.) 형식은 다르지만, 에너지로 유지되는 인체와 에너지의 가시화는 이러한 맥락과 닿아있다.      

 그는 시야를 파고드는 강한 색상과 짙은 윤곽선으로 그려진 인물의 얼굴과 손에서 시작해서 서거나 앉아있는 모습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동일한 주제의 드로잉을 진행해왔는데, 사전에 촬영을 하거나 무용수인 형을 통한 움직임과 자세관찰을 통하여 작가가 느끼는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노력해왔다. 이 다양한 시도 안에서도 변치 않는 것은 반복해서 그린 인물의 윤곽선과 머리카락은 그리지만 귀는 없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눈, 코, 입, 머리카락은 동일하게 에너지를 내 보내는 곳이지만 귀는 에너지가 들어오는 통로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아마도 자신을 표현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눈, 코, 입, 머리카락이고 타인의 표현을 특별한 반응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는 쪽이 귀라는 의미가 아닐까한다. 자신을 표현해내는 것 역시 개인의 내면에 크게 작용하는 하나의 에너지로서 작가가 집중하는 지점인 것이다. 

 작가는 어찌 보면 에너지를 가두는 인체의 윤곽선을 그리도 강조하면서, 어째서 출구는 그리고 입구는 막아버린 것일까. 이는 모순되게도 가두고자 해야 벗어나고자 하게 된다는 당연한 문장으로 풀 수 있을 듯하다. '양면가치ambivalence'라는 단어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반하는 두 감정이 병존하는 상태를 나타내며 이는 '모순矛盾', '동요動搖', '주저躊躇'로 표현된다. 우리는 종종 동일한 대상,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모순을 문득 깨닫게 되는데 이러한 점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하나의 딜레마라고 생각된다. 진심과 다른 말을 하거나, 관심을 바라면서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심리와 행동의 문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이 양면적 특성은 사람의 신체와 신체가 가진 에너지에도 적용하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양면가치로 해석이 가능하다. 상충하는 두 에너지의 공존, 에너지가 존재하는 영역의 테두리와 그에서 움직이고자하는 일렁이는 에너지의 공존, 표출하고자하며 입구를 닫은 인체의 표현은 작가 김용현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끌어내고자하면서도 꺼내놓지는 못하는 작가로서의 숙명에 해당하는 큰 과제이자 실현되어버리면 되려 사라져버릴까 겁이 나는 양면가치이다.

 전시되었던 작품 중 최종 작품에서는 표면이 다소 거칠어지고 외곽선이 흩어졌다. 이는 이제 작가는 통제할 수 없이 일어나는 본인의 에너지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해야 할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그가 자신 앞에 놓인 화제畵題를 풀어나가는데 집중할 에너지를 다시 지켜볼 차례이다. 

(캔파운데이션 전시팀장) 임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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