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

짧은 자유 낙하 

 

차도에 하얗게 칠해진 글자 ‘천천히’는 그것을 표시한 의도인 ‘차를 천천히 모세요’로 보통 읽힌다. 그러나 그렇게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라는 표시를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천천히 뭐? 천천히 어쩌라고? 지금 나보고 천천히 걸으라는 거야 뭐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관점은 당장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해야하는 운전자보다는 언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천천히’ 고민해볼 수 있는 산보객에 의해서 얻어질 때가 많을 것이다. 김용현의 <Take a walk 산책> 연작은 작가와 사물이 맺는 관계를 전면적으로 보여주지만 사실은 작가가 언어와 맺는 관계를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직접적으로 언어와 맺는 관계가 드러나는 장면도 적지만 있다. 경고문구가 들어 있는 안내판에 작가가 손을 대는 장면이다). 그 이유는 이미 사물들은 언어의 공간 속에 있는 한에서 사물이기 때문이고, 작가는 그 사물들의 배치를 다시 의미의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울타리가 있다고 하면, 울타리가 세워질 때의 의미는 ‘이곳을 넘어가지 마세요’였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울타리가 일정 높이를 갖고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울타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려고 한다: ‘저를 붙잡고 넘어가세요.’ 그리고 마침 울타리는 그렇게 붙잡고 넘어가기 좋은 높이이다. 울타리는 직접 영상에서 나오기도 하는 사물이면서 다른 사물들을 대표한다. 사물과 그에 대응하는 작가의 신체는 계속 이런 진행을 따른다. 

 

1. 사물이 원래의 용도 또는 우연적 결과에 따라 배치되어 있음(이 배치는 의미적으로 기능함).

2. 작가가 신체를 이용하여 그것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함(신체든 사물이든 기하적이라는 점에서 동기화 가능함).

3. 사물이 2의 과정으로 얻어진 의미를 위해서 그러한 배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

4. 다른 사물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확인하러 떠남. 

 

이런 태도는 ‘천천히’ 표시와 같은 단어들을(또는 문장들을) 얼마든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사물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이다. <추락 없는 낙하 A fall without crash> 역시 작가가 같은 입장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높이를 가진 사물들 위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굴러 떨어진다. 원래는 각기 다른 용도에 따라 특정한 높이를 갖고 배치되어 있는 사물들(차도와 보도를 구분하는 연석, 얕은 도랑, 벤치, 그리고 무엇보다 계단)이 모두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려 한다: ‘저로부터 제 높이에서 떨어지세요’ 그 사물들의 또 다른 공통적인 특징은 떨어져 죽지 않을 정도의 높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퍼포먼스 비디오이고 그렇기 때문에 떨어져 죽을 정도의 높이의 사물에서 떨어지는 장면 또한 얼마든지 계속해서 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의미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일정한 높이를 가진 요철 그 자체이지 그 정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퍼포먼스 비디오는 다큐멘터리적이라기보다 다분히 연극적인데, 작가와 사물, 오직 둘 사이에 암묵적인 대화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만큼 연극적이기 때문이다. (“제 높이에서 떨어지세요.” “네.”) 스크린을 꽉 채우는 사각의 프레임이 아닌 양 옆 끝이 곡선으로 깎인 프레임은 오페라글라스의 시야처럼 보임으로써 그런 연극성을 강조한다.

 

이 작품의 끝을 이루는 계단 장면은 작가의 태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계단은 단이라는 사물이 같은 높이로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단들이 모인 계단 전체의 높이는 높지만, 하나하나의 단은 그렇지 않다. 김용현이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계단의 모습처럼 연쇄적인 낙하를 불러일으키지만 추락하는 것은 막는다. 그 태도는 사물이 완전히 자의적인 의미를 띔으로써 한 인간을 집어삼키게 되는 것을 막으면서 사물이 새로운 언어적 가능성을 여전히 보유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자유를 또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홍승택-

A Short Free Fall

The word “slowly” painted in white on the roadway is usually read as “drive the car slowly,” the intent of the text is clear. However, it's not the only way the word can be read. Viewers can experience this by looking at the sign ‘slowly.’ “Slowly what? What do I do ‘Slowly’”? Ironically, this point of view will often be acquired by walkers who can think ‘slowly’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and objects, rather than drivers who must move quickly to their destination. Kim Yonghyun's <Take a Walk> series fully demonstration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rtist and objects, but in fact, it is also correct to say that it demonstrat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rtist and language. (There are few scenes where the relationship with language is directly revealed. There is the scene where the artist touches a sign with warnings). This is because objects are already objects as long as they are in the field of language, and the artist tries to understand the arrangement of the objects in the dimension of meaning. If there were a fence on the street, the meaning when the fence was erected would have been ‘Do not go over here.’ However, when the artist sees that the fence is erected at a certain height, he tries to imagine that the fence is saying: ‘Hold me and pass over.’ And lastly, the fence is a good height to hold and pass over. When projected directly from a video, a fence represents other objects. The artist continues to follow this process using his body to respond to the object.

 

1. Objects are arranged according to their intended use or accidental consequences (this arrangement functions semantically).

2. The artist newly understands the meaning of it by using the body (it is possible to synchronize the body or the object in that it is geometric).

3. Make things appear to have such an arrangement for the meaning obtained by the process of 2.

4. Set off to see if other things can do that too. 

 

This is an attitude that treats things in the same way, just as words (or sentences) such as 'slowly' can be understood differently based on their context. I think A fall without crash is also the work created by the artist in the same position. On objects with relatively low heights, the artist intentionally rolls over. Originally, I would think that objects (curbstones separating driveways and sidewalks, shallow ditches, benches, and, above all, stairs), were all arranged at a certain height for different uses were saying, “Fall from the height I have.” Another common feature of those objects is that they are so low that a fall will not be fatal. This work is a performance video, so it is possible to continuously produce scenes falling from objects that are high enough to fall and die. However, what is important to the artist is that a certain height that can function semantically is important, not a higher height. That is why there is no reason to have a scene falling from a high place. Nevertheless, this performance video is more theatrical than documentary. It is theatrical because it can be seen that there was an implicit dialogue between the author and the object. (“Fall from my height.” “Yes.”) Rather than the square frame that fills the screen, the frame with curved ends on both sides emphasizes such theatricality by resembling a view out of opera glasses. The staircase scene at the end of this work can be said to encapsulate the artist's attitude in the most succinct way. A staircase is a step in which objects called steps are continuously arranged at the same height. The height of the entire staircase where such steps are gathered is high, but each step is not. Kim Yong-hyun's attitude toward objects causes a series of falls, like a staircase, but prevents them from falling. That attitude prevents things from swallowing up a human being by expressing a completely arbitrary meaning. This allows things to still hold new linguistic possibilities. If not this way, how else can you get freedom? 

 

-Hong Seoug-tek

버려진 자전거는 어떻게 그 자유를 얻었을까?

파블로 네루다 “ 질문의 책”

 

 나는 보편적 행동규칙을 탐색하고,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 제공된 환경을 

이용하는 필수적 행동에 주목한다.

 인간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보행신호를 기다리고, 문을 열려고 시계방향으로 손잡이를 돌린다. 모두가 약속한 행동규범은 사회가 개인에게 보여주는 대규모 퍼포먼스의 일부분으로 보였다. 사회가 제공하는 규범과 행동양식은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모습도 있었지만 그 효율과 합리의 이득을 개개인이 가져가지 않았다. 새벽에 아무도 다니지 않은 횡단보도의 보행등은 누구를 위해 깜박거리고 있는지는 알길 없다. 인간 에게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 잡은 질서와 환경을 활용 하려고 실행하는 행동은 인간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이것은 개인과 사회를 구축 시키는 근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횡단보도 사거리 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약속한 신호에 맞춰서 출발하고 정지하기를 반복한다. 오른쪽 방향으로 길을 걷고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오르내린다. 핸드폰을 위아래로 드래그 하면서 읽거나 본다. 우리의 아주 작은 행동양식도 교육 속에서 익혀왔고 실행되고 있다. 이것은 사소하지만 잠재적 질서로 작용하고 고정된 흐름으로 유도하고 있다. 세상 안 밖에서 주체와 자유를 외치지만 인간의 일상은 공장 컨베이너 벨트처럼 분업화되고 기능과 효율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인간의 작은 움직임 중 개개인의 자유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행동은 무엇이 있을까?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은 어디서 생겨날까? 기능과 효율을 버린 움직임만이 개인에게 의미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행동인 것인가? 사회의 존재 이유가 개인의 행복과 주체적 삶에 반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다양한 시선에서 의미와 결과가 도출되고 그에 따른 시선도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내가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은 인간은 늘 최대치의 자유 속에서 살고 있고 일부를 제외한 많은 사람은 자신들이 꽤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물리적 자유를 제한하는 상태에서 변화를 꾀하였다. 물리적 이동과 생각의 자유를 개인에게 내어주고 사회는 공간과 이념, 자본을 점유하고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개인에게 요구한다. 인간은 노동을 하기위해 필요한 필수적 움직임이 있다. 이 움직임은 사회가 만든 제약된 환경에서 이용하게 되며 이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인간은 자유를 얻기 위해 노동한다.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으로 우린 자유를 획득하는가? 우린 노동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활동에 대해서만 보상을 받는다. 일자리로 이동하기 위해 필수적 이용해야하는 대중교통 이용, 문을 여는 등 일상의 작은 행동에 대한 보상은 없다. 이 부분에서 우린 계속 어긋난다. 노동의 댓가로 아무리 많은 돈을 받아도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적절한 보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일부분의 노동만이 사회에서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패턴을 강요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아니다. 노동이나 축제현장으로 가기 위해 인간이 필수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행동의 집합들 이것이 사회를 구축시키고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또 다른 댓가 였다.

 

나는 생활반경 과 익숙한 시각 이미지를 가진 이국적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퍼포먼스를 실행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해봤을 바닥에 새겨진 방향 지시대로 따라 걷기부터 길 위의 쓰레기를 정리하고, 공원 의자의 위치를 바꾸고, 넘어져 있는 사물을 일으켜 세우는 행동을 한다. 이런 행동은 거리의 경고판 일부를 가려 다른 지시를 만들거나, 의심 없이 따르던 사회적 지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이것을 조종하는 듯한 퍼포먼스로 실행된다. 풍력발전소의 프로펠러 속도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자동으로 켜지는 가로등과 간판, 조명을 손가락 하나로 조절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내리막길을 카트를 타고 내려가 바다에 빠지고,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자동차와 함께 걸어간다. 2017년부터 위 작업을 작은 단위 마을에서 시작했고 도시 국가 인종까지 더 넓은 단위로 작업을 진행하고 자 계획하고 있다. 서울, 경기도 및 지방 도시와 도서산간 대부도, 영흥도, 탄도 외에 한국과 유사한 문화권을 형성한 중국 연변에서 작업을 진행 하면서 한 인간이 가진 사회와 질서, 자유와 통제 내 외부를 살펴봤다. 이런 연구를 기반으로 사회 속에서 개인과 개인이 바라보게 되는 사회의 복합적 개념을 가진 영상 퍼포먼스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김용현-

 “I search for large-scale quotidian performances the society carries out.”

I search for universal codes of behavior in our human society. I pay attention to behaviors indispensable for using the environment given to the human society. To cross the street at a crosswalk, we wait for the green light and we turn the knob clockwise to open the door. These arranged codes of behavior look like large-scale performances that the society shows individuals. 

I create my works based on the method of doing performances by myself through video recording. I carry out performances carrying a camera and visiting different places such as cities and islands of Korea as well as China. My performances are realized in the following manners: I put trash on the street in order according to my standards, I change the position of benches of the park, I lift some fallen objects up, I point out the street warning signs, I move following the direction indication marked on the floor, I move my body in accordance with speed of the propeller of a wind power plant and I do some gestures as to manipulate the automatic streetlamp and glitter of lighting from standing signboards. Moreover, I go down the slope riding a cart and fall into the sea, and I suddenly get off the car and walk along the car. 

양면가치   

 

문득,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생물학적으로 완벽히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의지는 없으나 그것을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완벽히 사고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몸은 말을 듣지 않으나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정신에너지와 신체에너지는 일견 상반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우리에게 어느 한 쪽의 결핍이 일어난다면 그 즉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무형의 에너지는 그 존재를 가시화하기 위하여 사물이나 몸을 필요로 하고 몸은 기운氣韻이 있어야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움직임을 할 수 있다. 살아있기 위하여 요구되는 최소한의 숨을 쉬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는 다시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로 세분화해서 들어가게 되는 단초가 된다. 

 에너지는 형태를 넘어서지만 형태에 뿌리를 두어야 가시화할 수 있다. 작가 김용현의 화면에는 에너지를 가시화했다고 할 수 있는 형태가 있다. 이는 회화와 영상 두 가지의 장르를 통해 드러난다. 정지되어 있으나 작가의 에너지와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드러나는 회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으나 도구나 색감의 변이로 에너지의 교집합을 드러내는 영상은 전시의 타이틀 <양면가치兩面價値>를 보여주는, 접해있으나 명백히 다른, 또 하나의 양면의 가치를 담고 있다.

 사람의 감정에너지의 흐름을 보여주는 카를리안 사진기kirlian camera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신체에너지의 흐름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서 보면 색상의 왜곡은 있으나 어둠에서도 대상의 형체와 작은 움직임까지 기록할 수 있고, 열감지 카메라를 이용한다면 세심한 움직임은 몰라도 살아있는 생명체의 존재와 큰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카메라는 특수한 상황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에도 일반적인 신체가 내포하고 있는 에너지의 움직임을 시각화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미술분야에서 작가의 사고와 관념을 표현해내는 방법이야말로 눈빛과 움직임과 그 안의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도 않고 뚜렷한 형태도 없는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작가 김용현은 대학원 재학 중 에너지, 보이지 않는 기운을 표현하고자 다양한 방식들을 실험했는데 자신의 신체에 에너지를 표방할 수 있는 색을 칠하는 행위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본 전시에서 변화양상을 보이는데, 두 사람이 다른 색상을 칠할 얼굴과 발을 맞닿아 움직여 두 색이 섞여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움직임에 대한 어떠한 지시도 없이, 일단 맞닿은 얼굴과 발은 떨어지지 않고 영상이 끝날 때까지 마찰을 지속한다는 하나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각자의 움직임은, 양자兩者는 나름의 에너지를 하나의 원칙에 집중하고 이것은 색이 혼합되는 과정을 통하여 에너지의 가시화를 실현한다. 

 다른 하나의 영상에서는 푸른색 물감이 잔뜩 묻은 실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일상에서 비닐봉투나 혹은 엉긴 목걸이, 긴 끈을 풀 일이 있는데 이 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는 반드시 풀어내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어도 과정에서 우리는 쉽게 그만두지 않고 에너지를 쏟게 된다. 매우 단순하지만 이것은 에너지의 가시화를 아주 명쾌하게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입체와 설치 작업을 통하여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림자가 사물의 존재를 나타내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에 집중하기도 하고, 가구의 틈으로 가는 실이 흘러내리거나 새어나오는 형상을 통하여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를 시도해왔던 때부터 이 모든 작업에 관련한 드로잉을 그려왔다.(그에게 영상, 드로잉에서 드러나는 실은 가장 유연하게 에너지의 흐름이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오브제이다.) 형식은 다르지만, 에너지로 유지되는 인체와 에너지의 가시화는 이러한 맥락과 닿아있다.      

 그는 시야를 파고드는 강한 색상과 짙은 윤곽선으로 그려진 인물의 얼굴과 손에서 시작해서 서거나 앉아있는 모습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동일한 주제의 드로잉을 진행해왔는데, 사전에 촬영을 하거나 무용수인 형을 통한 움직임과 자세관찰을 통하여 작가가 느끼는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노력해왔다. 이 다양한 시도 안에서도 변치 않는 것은 반복해서 그린 인물의 윤곽선과 머리카락은 그리지만 귀는 없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눈, 코, 입, 머리카락은 동일하게 에너지를 내 보내는 곳이지만 귀는 에너지가 들어오는 통로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아마도 자신을 표현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눈, 코, 입, 머리카락이고 타인의 표현을 특별한 반응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는 쪽이 귀라는 의미가 아닐까한다. 자신을 표현해내는 것 역시 개인의 내면에 크게 작용하는 하나의 에너지로서 작가가 집중하는 지점인 것이다. 

 작가는 어찌 보면 에너지를 가두는 인체의 윤곽선을 그리도 강조하면서, 어째서 출구는 그리고 입구는 막아버린 것일까. 이는 모순되게도 가두고자 해야 벗어나고자 하게 된다는 당연한 문장으로 풀 수 있을 듯하다. '양면가치ambivalence'라는 단어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반하는 두 감정이 병존하는 상태를 나타내며 이는 '모순矛盾', '동요動搖', '주저躊躇'로 표현된다. 우리는 종종 동일한 대상,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모순을 문득 깨닫게 되는데 이러한 점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하나의 딜레마라고 생각된다. 진심과 다른 말을 하거나, 관심을 바라면서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심리와 행동의 문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이 양면적 특성은 사람의 신체와 신체가 가진 에너지에도 적용하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양면가치로 해석이 가능하다. 상충하는 두 에너지의 공존, 에너지가 존재하는 영역의 테두리와 그에서 움직이고자하는 일렁이는 에너지의 공존, 표출하고자하며 입구를 닫은 인체의 표현은 작가 김용현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끌어내고자하면서도 꺼내놓지는 못하는 작가로서의 숙명에 해당하는 큰 과제이자 실현되어버리면 되려 사라져버릴까 겁이 나는 양면가치이다.

 전시되었던 작품 중 최종 작품에서는 표면이 다소 거칠어지고 외곽선이 흩어졌다. 이는 이제 작가는 통제할 수 없이 일어나는 본인의 에너지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해야 할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그가 자신 앞에 놓인 화제畵題를 풀어나가는데 집중할 에너지를 다시 지켜볼 차례이다. 

(캔파운데이션 전시팀장) 임경민